權昌倫(권창륜)
韓退之는 <送高閑上人序>에서 “장욱은 초서를 잘 썼는데 다른 기술은 다루지 않았다. 기쁨, 성남, 난처함, 곤경, 근심, 슬픔, 유쾌, 원한, 사모, 술에 잔뜩 취하거나 무료할 때, 불평이 있을 때, 마음이 발동하면 반드시 초서를 썼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옛날 장욱은 초서를 잘 썼는데 물상을 관찰하고 산천이나 절벽, 짐승이나 새, 벌레와 물고기, 꽃과 열매, 일월성신, 풍우수화, 뢰성벽력, 가무전투 등 천지만물의 변화와 즐겁거나 경악스러움을 글씨에 붙여 써 넣었다. 그렇기 때문에 장욱의 글씨는 귀신이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는 것 같아서 그 실마리를 찾기 어렵다”고 하였다.
심정이 매우 불편하면 미친 듯 맹렬히 술을 마신 뒤 奮筆疾書하였다고 한다. 장욱은 말하기를 “음주는 성정을 북돋우고, 길러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고 초서는 자기의 뜻을 매우 通暢하게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작서 태도는 率眞顚逸하여 千變萬化하는 풍격을 자아내게 된다.
鄭板橋는 양주 八怪 가운데에서 서화에 대한 심미철학이 제일 뛰어난 사상가이다. 그의 주장은 학예 수련 외 방도에 대하여 “學一半, 抛一半, 不能全學이라는 指標를 세워서 窮究함으로써 蘊奧의 경지에 올랐다. 즉, 학문의 대상에 대하여 배워 절반을 취하고, 절반은 채택하지 않고 포기한다. 전체의 학문을 모두 배워 터득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이는 前賢의 오묘한 서화 범주를 모두 다 터득 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다 이해하였더라도 취사선택하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판교는 서법변혁의 指南이 담긴 一則의 題跋에서 “中郎(채옹)의 체와 太傳(종요)의 운필, 右軍(왕희지)의 필법에 의하여 자기의 뜻을 담아 실제로 나타내려고 하였으나 소위 채·종·왕의 法相과 意態는 나타나지 않으니 어찌 <난정>의 면모를 나타낼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는 개성의 發現을 지칭하는 말로써 怪誕(기괴하고 허황됨)의 始原을 예고하는 것이라 하겠다.
판교는 眞, 草, 隷, 篆을 合成한 六分半書를 창안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亂石鋪階体라 일컬었으며 매우 讚賞하였다. 東倒西歪의 字格과 体勢, 行間의 錯落한 章法을 구사하여 放狂不覇한 개성의 流露로서 眞氣, 眞意, 眞趣를 表出하여 不朽의 名品을 이루어 내었다.
<題亂蘭亂竹亂石与汪希林>에서 “하늘을 열어젖히고 땅을 번쩍들 듯한 문장이나, 뇌성벽력이 진동하는 듯한 글씨, 귀신을 깜짝 놀라게 꾸짖는 듯한 말, 옛날에도 없었고 지금에도 없는 기상천외의 그림은 원래 眼孔中에는 없다. 그림 그리기 전에 한 格律을 세우지 말고, 그린 뒤에도 하나의 화격을 남기지 말라”하고 正히 生花妙筆의 千變萬化하는 杰作을 창안해 내었다.
八大山人은 일생동안 회화 창작에 주요 정력을 집중시켰던 명나라 황족의 貴胃이다. 그의 글씨는 그림에 가리어져 빛을 덜 받았지만 학자와 평가들은 서법의 조예가 회화보다 높게 품평 하였다. 청말의 황변홍은 일찍이 팔대산인의 예술에 대하여 “書一, 畵二”라고 호평하였다. 전서의 圓潤한 선조를 행·초에 적용하여 激昂하지도 않고 藏頭護尾의 모습도 나타나지 않게 자연스레 써 내려가 超高의 수법을 구사하였다. 起止, 運行, 回鋒, 轉折을 자기의 마음 깊은 곳에 감추어 표면상으로는 흔적이 나타나지 않게 하여 拙속에 巧를 숨기고 澁筆로서 소박함을 살려내었다.
팔대산인의 서법은 淡遠簡靜하고 朴實無華하며 雕琢을 가하지 않아 일체의 기법을 도외시한 서품에 가까워서 王鐸과 傅山의 纆繞(휘감고 얽힌 결구)하고 미친 듯 떠벌리는 결자나 포국 및 장법과는 판이하게 대조가 된다. 팔대산인의 예술경개를 분석해보면 대체로 高古, 寂靜, 冷逸의 세 방면으로 추출된다. <二十四詩品>에서 高古란 一品은 “八荒之表를 높이 올라 밟고 마음으로 千秋의 세월을 버티었다”는 것은 서화가 추구하는 공동의 이상중의 하나이다. 이로 인하여 蒼古, 簡古, 簫古, 太古, 荒古, 曠古, 古朴, 古淡, 古境의 품격이며 荒寒簫古의 意境이다.
팔대산인의 線條는 粗簡, 粗怪凸兀, 平淡簡古하며 점획은 起伏이 많지 않다. 震動하고 放蕩함도 없어서 태초의 鴻蒙之初의 渾沌의 기상을 연상케 한다. 작품마다 一片의 玄漠하고 荒疏的 渾元之氣로 일관하고 있다. 이상으로 장욱의 心動暢志로서 奮筆疾書함과 팔대산인의 淡遠簡靜과 朴實無華한 품격, 정판교의 진, 초, 예진의 합성체인 六分半書로서 亂石鋪階하여 東倒西歪한 法態와 背經叛道(서법경전과 도리를 배반)의 怪奇를 살펴보았다.
이러한 연유는 현하의 현대서풍이 너무 서법의 정석을 考究하다 보니 대부분의 서예가가 단아하고 방정함에 얽매여서 呆板齊整으로만 흘러서 自我의 發露와 개성추구의 변혁을 유도하려는 측면에서이다.
금번의 壬寅年書展을 펼치는 雲臺同學의 書品을 一瞥해보는 과정에서 뭔가 변화된 書相, 書風이 보이기 때문에 椎究해보아 筆者의 省察의 계기를 마련해 보았다. 특히 운대의 행초와 예서에서 그 形局과 筆調의 變異를 보여주었음에 감동하게 되었다. 예서의 字態에서 左低右高의 倚側으로 글자의 中心을 重心으로 移替하여 二次元의 動勢를 취한점이 異彩로우며, 이것이 운대의 개성미의 표출 始原點이라 보여지고 그 다음으로 행초의 体相과 意態, 章法에서
· 첫째, 그 畫質이 매우 簡朴하고 率意하며
· 둘째, 行勢에서 東倒西歪(동쪽, 서쪽으로 비뚤어짐)의 錯落한 節奏로서 重心의 動態를 이루고 있는 점.
· 셋째, 무엇보다도 字格과 意境이 朴實無華하고 淡白하고 眞趣, 率意하다는 점.
이러한 점이 이번 임인서전의 수확이요 운대의 독자적 서풍의 樓閣을 조성하게 된 성과라 생각된다.
관상자의 안복에 보탬이 되었으면 기대해본다.
壬寅秋季 北岳山 楓谷下(임인추계 북악산 풍곡하)